마감시간 직전의 폭풍 작성, 정말 즐겁고 보람될까?
“백지만 보면 머리가 하얗게 돼요.”
“안절부절못하다가… 마감 전날 일필휘지로”
“열심히 썼는데 남는 게 없어요.”
대학생이 되면 글쓰기 과제가 본격적으로 많아진다. 글의 가짓수뿐 아니라, 분량도 길어지고 종류도 서평, 보고서, 감상문, 논평문, 논문 등 다양해진다. 물론 대학생다운 글, 지성인다운 글을 써내야 한다.
대학생은 또 바쁘다. 꽃 피는 교정에 앉아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선배들과 밤새워 인생을 논할 줄 알았건만, 입학 첫 학기부터 대여섯 과목씩 예습, 복습, 퀴즈는 물론 중간 중간 제출해야 하는 과제까지 잊지 말아야 하고, 그 와중에 반별 혹은 전공별 모임에 동아리까지. 이제 대학입시 시달림도 없어졌으니 가족 모임도 가고 싶고, 봉사활동도 하고픈데, 아참, 취업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은 기본. 그러다보니 “아,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를 되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재인’은 과제를 꼬박꼬박 제때 제출해낸다. 옆 사람들은 글쓰기가 능숙하고 즐거운 학생인 줄 알았지만, 막상 글쓰기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재인 스스로도 괴롭기만 하다고 호소한다. 왜 그럴까? 재인을 관찰해 보았다.
재인의 비결(?)은 “마감시간을 확인한 후, 마감시간 직전에 쓰는 것”이었다. 마감이 저 앞에 보이는데도 미루고 미루기 일쑤다. 이미 종영된 드라마를 느닷없이 정주행하기도 하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인터넷 고구마 캐기에 빠지기도 한다. 몸은 딴 짓, 마음은 불안과 초조, 때로는 심한 자기 비하로 터질 것만 같다가, 드디어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시점이 되는 마감시간 직전에 폭풍 작문을 해낸다. 글의 주제, 주장, 자료와 근거, 구성과 표현 등등 머릿속에서 맴돌던 요소들을 순식간에 짜 맞출 수밖에 없다. 희한하게도 그 순간 이제까지의 불안감은 사라지고 강렬한 희열을 맛보곤 한다. 드디어 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가 떨어지기 직전에 과제를 업로드한다. 미션 완료, 이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글쓰기를 거듭하면 글쓰기 능력이 발전할까? 무엇보다 재인의 글쓰기 경험은 즐거운 일일까? 결코 긍정적인 답은 해주기 어려울 것이다. 글쓰기는 그 과정이 즐거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글 쓰는 이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겉으로 보면 일필휘지라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냥 미루는 행위일 뿐이다. 글쓰기 능력이 좋아지기를 바라긴 어불성설이다.
능숙하고 즐거운 필자는 글쓰기를 단계적으로 해낸다
일필휘지란 없다. 어떤 위대한 작가도 붓 한 번 휘둘러 명작을 완성해 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설령 옆에서 보기에 평소에 펜을 쥐거나 자판을 두들기는 일이 없는 듯했던 논객들도 틈틈이 어떻게든 끼적거리며 무수한 글을 짓고 허물고 또 짓는 과정을 반복했을 뿐이다.
글쓰기란 한 번 시작하면 누에고치 입에서 비단 줄이 술술 나오듯 하는 과정이 아니다. 글쓰기는 건축물을 짓는 일과 비슷하다. 설계하기, 토대 다지기, 들보, 벽체, 바닥 만들기, 단열, 방수, 배관과 전기 공사, 그리고 조경과 마감처럼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다. 능숙한 필자는 글쓰기도 이렇게 자신의 작업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즐거운 필자란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자신을 향상 시켜나가는 사람, 힘든 과정이지만 보람을 느껴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건축물은 각 단계가 철저히 완성되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글쓰기는 어느 정도 틀만 잡히면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초안을 완성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땅값, 자재 구입비 등 비용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건축은 대부분 건축가의 지휘 아래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협업을 하지만 글쓰기는 전적으로 혼자 진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 편의 건축물을 혼자 구상하고 만들어내는 글쓰기란 그래서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까?
글쓰기의 단계: 완성된 글은 빙산의 일각일 뿐. —————————- 주제 혹은 글감 정하기 자료 검색, 수집, 분석하기 주장과 근거를 정하고, 세부 구성 요소를 정하는 단계, 즉 개요를 작성하는 단계 초고 써내기 고쳐 쓰기 최종 편집을 완성하여 제출하기 |
그렇지만 글쓰기에 정말 아무 비용이 들지 않을까? 물론 값비싼 기회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그 기회비용이란 바로 시간이다. 한 학기는 15주, 한 주는 7일, 하루는 24시간, 여러 강좌를 듣고 다양한 활동으로 분주한 대학생이라면 한 편의 과제물을 써내는 데 짧으면 서너 시간, 길어야 10시간 이상 투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과제 마감이 아직 한 달, 2주 남았으니 여유 있어 보이지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첫 걸음은 마감 시간과 나의 가용 시간 확인해두기
학기 초마다 되풀이되는 “이번 학기는 미리미리 글쓰기를 하자.”는 다짐을 성공으로 끝내는 첫째 방법은 글쓰기 단계에 따라 시간을 나누는 것이다.
첫째, 마감시간을 확인하기.
스마트폰, 달력, 수첩에 마감시간을 기록해 놓는다. 스마트폰 알람이 일주일, 이틀 전 등 주기마다 작동하도록 해놓는 일은 필수.
둘째, 글쓰기의 물리적 조건을 확인하여 투여 가능한 시간 잡아두기.
다음에는 글의 종류, 분량을 확인한다. 한 쪽 에세이, 두 쪽 공연 논평, 네 쪽 서평, 열 쪽 보고서 혹은 소논문 등등마다 내가 얼마나 시간을 쓸 수 있는지 미리 가늠해야 한다. 가령 서평 쓰기 과제인데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책이라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수강하는 다른 과목이나 나의 다른 활동을 감안하면 아무리 길어도 순수하게 12시간은 투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글쓰기의 물리적 조건 (글쓰기의 내용적 조건은 글의 목적, 주제, 독자 대상 등) | |
글의 양식과 분량 | 주제의 범위, 자료의 폭과 양, 필요한 논증의 깊이가 달라진다. |
마감 시간 |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
언제까지 구상, 조사를? 정보 입력 정지!
엉망진창 초고라도 빨리 써내기, 글쓰기 성공의 비결
준비하고 계획하여 원고를 써내고 고쳐 써서 완성한다. 누가 이런 공정을 모를까? 바쁜 대학생에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며 안성맞춤인 시간관리법을 소개한다. 어려워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완성된 글을 써내는 대신 초고를 먼저 쓰는 것이다.
초고란 이제까지 구상, 분석, 설계된 대로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낸 원고다. 독자는 자기 혼자일 뿐이니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초고를 빨리 탈고하면 고쳐 쓰며 완성함은 물론 깔끔하게 편집할 여유도 생긴다. 분초를 다투다가 과제 창이 닫혀버리거나 마감 몇 분 전에 트래픽 증가로 인터넷이 정지되었다며 화면 캡처까지 교수님에게 보내 읍소하는 장면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은 즐거운 덤이다.
물론 초고를 빨리 썼으니 구성이나 논지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고쳐 쓸 시간이 남아 있다. 고쳐 쓰는 동안 글의 구성과 논지가 더 다듬어지며, 처음 읽었던 자료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되면서 새로운 발견도 하게 된다. 더욱 편한 것은 안절부절못하며 속 끓이는 일도 없어진다는 것이니,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서툰 필자에서 능숙한 필자로 성장하게 된다.
끝없는 검색과 정보 입력은 일단 멈추자. 자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료를 ‘깊이 읽어내는 나만의 성찰’이 핵심이니 말이다.
분절형 쓰기 과정: 단계를 나눠 시간 분배하기의 실제
초고를 빨리 쓰는 글쓰기는 분절형 과정 설계라는 방법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런 글쓰기방법을 (1/2)n형 글쓰기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차익종 2016 참조). 즉 글쓰기를 독립된 과정으로 ‘분절하여’ 집중하여 진행하되, 그 사이에 휴식 혹은 다른 일 하기를 허용하는 방법이다.
글쓰기 단계는 ‘준비 단계’, ‘쓰기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준비 단계는 <구상: 주제 잡기>, <분석: 자료 수집과 분석>, <논지 정리: 주장과 근거 확정하기>, <설계: 구성하기와 개요 작성하기>로 나눌 수 있고, 쓰기 단계는 초고 써내기, 고쳐 쓰기, 편집과 제출로 구분한다.
이제 이 단계마다 시간을 분배해 본다. 익숙한 글 종류인가 아닌가에 따라 또 글의 분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서평 쓰기라면 다음과 같이 해 본다. 서평은 책을 두 번 읽는 과정이 전제되어야겠다. 조금 어려운 책의 경우 한 번은 통독, 한 번은 정독을 마쳤다고 전제하면, 빠듯이 16시간을 할당해 준다. 이때 유의할 점은 16시간을 한 번에 몰아서 쓰기보다는 조금씩 나누어 여러 날에 걸쳐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야 글쓰기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며, 학기 중 발생하는 여러 일들을 병행할 수 있다. 하루에 몰아쓰기로 작정했다면 아찔한 ‘마감시간 직전 쓰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준비 단계: 8시간 | 구상 2시간 분석 (자료 수집과 분석) 3시간 논지 정리 2시간 설계(구성과 개요) 1시간 | 각 단계의 시작과 끝은 흐름이 끊기지 않고 한 번에 진행하되, 단계가 끝나면 휴식이나 다른 일 하기가 가능하다. 각 단계는 서로 맞물려 있다. 설계 과정에서 분석과 논지 정리가 달라지기도 하며, 초고를 쓰다보면 개요도 자연스럽게 수정된다. 전체를 하루에 몰아서 하지 말고 여러 날에 걸쳐서 나눠 진행하면 ‘끈을 놓지 않고’ 글쓰기를 할 수 있다. |
쓰기 단계: 8시간 | 초고 쓰기 4시간 고쳐 쓰기 2시간 편집 2시간 |
준비 단계가 끝났다는 것은 세부 개요까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요리로 비유한다면 레시피가 확정되고 재료가 갖춰진 셈이다. 그러나 8시간만으로 아직 개요가 불충분하긴 해도 준비는 끝났다. 마감시간이 보이니, 마냥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준비 단계가 끝나면 스스로에게 보상을 준다. 휴식이다. 혹은 다른 일을 여유롭게 할 수 있다. 초조하지 않다. 의미 있는 한 단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쓰기 단계 8시간은 초고 쓰기 4시간과 나머지 4시간으로 분배한다. 네 시간 만에 초고를 쓸 수 있다고? 물론 가능하다. 8시간을 집중했던 준비 단계의 성과가 힘이 되어 준다. 더구나 초고는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독자는 나 혼자뿐이니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개요도 깊은 생각도 부족하다고 느껴도 일단 초고를 탈고한다. 한 단계가 끝났으니 잠시 손을 놓아도 좋다. 글의 완성도는 언제 올라갈까? 고쳐 쓰기 단계에서다.
나머지 4시간은 고쳐 쓰기 2시간, 편집 2시간으로 진행한다. 고쳐 쓰기는 글의 주제가 일관되게 쓰였는지, 핵심 주장이 논리적인지, 글의 흐름과 구성이 자연스러운지, 군더더기나 부정확한 표현은 없는지를 검토한다. 그리고 나머지 2시간은 글의 스타일, 정서법, 인용, 참고문헌 등을 재확인한다.
없는 시간도 늘려주는 분절형 시간관리법
분절형 글쓰기로 시간 관리를 하게 되면 안절부절못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준비 단계를 마냥 늘리다가 결국 마감시간을 맞닥뜨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준비단계가 부족하거나 초고가 날림처럼 보여도 고쳐 쓰기 단계가 비교적 충분히 보장되는 덕에 오히려 글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게다가 각 단계 사이에 다른 일도 해낼 수 있으니 오히려 시간이 늘어나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워드 베커라는 미국의 유명 사회학자는 이런 방법으로 동시에 학술 논문 5-6편을 쓰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차익종 2016 참조).
한 단계는 한 번에, 초고는 단번에
그 대신 각 단계를 가능하면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좋다. 일단 한 단계를 시작했으면 그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특히 초고 쓰기가 그렇다. 일단 시작했으면 어쨌든 초고 끝까지 마침표를 찍는 것이 중요하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하는 말이 있다. “작가란 누구인가? 일단 펜을 들었으면 끝까지 써내는 사람이다.” “대가가 되고 싶은가? 먼저 작가가 되어야 가능하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집중력이 약하거나 한 번 앉으면 두 시간 아니 한 시간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람은 자신에게 맞도록 한 시간 단위로 단계를 다시 분할하기를 권한다. 초고 제목과 서론, 그리고 본론 첫 문단 쓰기를 초고 쓰기의 1단계로 설정하는 것이다. 매번 이런 어려움이 되풀이 된다면 시간관리만이 아니라 공간 관리도 문제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모두 고려하기
아무리 시간 관리를 잘 하려고 시도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할 수도 있다. 의지는 있지만 몸이 따르지 못해서일까? 잘 들여다보면, ‘의지가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시간이 글쓰기의 물리적 조건인 것처럼, 글을 쓰게 만드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행동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시간만큼 중요한 것이 공간이다. 특정 공간에서는 특정 작업에 최적화되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다. 게임을 주로 하던 책상에서 별안간 집중된 글쓰기를 할 수 없다. 전혀 다른 글쓰기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자기가 할당한 시간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지도 계획에 포함시켜 보자. 이번 과제는 학교 도서관에서 밤 새워 해보기, 공부방에 있는 물품 중 글쓰기와 관련이 없는 것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치워 놓기, 아니면 책상을 떠나 거실이나 주방 앞에서 글쓰기, 책상을 거실 한 가운데로 옮겨 식구 모두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보기, 인터넷이 안 되는 카페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 쓰기(감염병 유행 시대에는 절대 권하지 않지만) 등등.
그래도 글 막힘(writer’s block)?
그래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시간 관리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억지로 쓰고 있다(동기 부여 결핍)거나, 준비가 정말로 부족하거나(내용의 빈약), 글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 선입관이 강해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평소의 생활 습관 때문에 오롯이 글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자기 조절 능력). 결국 ‘글 막힘’ 현상인가. 글 막힘 현상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같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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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차익종 (2016), 서평: 우선 엉망진창 초고부터 쓰자 – 『사회과학자의 글쓰기(하워드 베커)』, 『가르침과 배움』 32-3, 서울대학교 교수학습개발센터.
하워드 베커, 이성용ㆍ이철우 옮김 (1999), 『사회과학자의 글쓰기』, 일신사.
차익종
서울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관계수업』,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블랙스완』, 『최후의 교수들』,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 『불평등과 싸우는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등 여러 권을 우리말로 옮겼고, 『칼럼 쓰기: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에세이』(근간)를 썼다.
삽화: 김아영 (영어영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