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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궁금했으면 하는, 번역 세상 이야기] 5.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당신에게 – 이상원

[당신이 궁금했으면 하는, 번역 세상 이야기] 5.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당신에게 – 이상원

아주 가끔씩 대학 강의실에서도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학생을 만나는 일이 있다. 외국어문학 전공생이 하는 말이니 아마도 문학 번역을 말하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대학 밖으로 나가면 번역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확 늘어난다. 직장인들의 부업으로, 출퇴근이 어려운 주부들의 돈벌이로 꽤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책 번역을 한다고 나를 소개했을 때 “오, 멋있는 일을 하시네요.”라며 부러운 시선을 보내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번역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번역에는 실제로 긍정적인 면도 있다. 번역가는 사람을 상대하기보다 책을 상대한다. (물론 출판사 사장이나 편집자는 만나야 한다.) 책을 계속 읽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주된 일이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고충이 덜하다. 또한 출퇴근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긍정적인 면이다. 물론 반대편도 있다. 고충을 털어놓거나 서로 위로할 동료 없이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일, 결과물에 대해 오롯이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감, 근무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대신 하루 24시간이 온통 일하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상황, 늘 부족한 시간 등은 부정적인 면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큰돈을 벌 다른 재주가 있기는 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처음 책 번역의 길로 들어서면서 내게 무슨 대단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IMF 구체금융 후폭풍이 몰아치던 1998년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국제회의 통역사, 정치경제나 과학기술 문서 번역 등 통번역대학원 졸업생이 예상하는 보편적 진로가 막혀 버렸다. 그 때 여러 우연들이 겹치면서 책 번역의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한 권 두 권 하다 보니 책 번역이 나와 꽤 잘 맞는 작업이라는 걸 발견했고 지금까지 90권 넘는 번역서를 내면서 일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나는 제대로 준비를 못한 채 덜컥 번역의 길로 들어섰지만 지금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주의사항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하는 일은 책 번역이므로 주의사항도 대부분 이와 관련된다.)

 

첫째, 책을 싫어한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책, 넓게 말해 글로 쓰인 텍스트에 대한 관심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평소에 재미있게 책을 읽고 거기 드러난 저자의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면, 인상 깊은 구절을 기억하거나 메모하고 그 구절이 쓰인 맥락을 고민해 보았다면 일단 합격이다. 흥미진진한 책 뿐 아니라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재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자신에게 재미없는 책을 번역해야 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하고 명료한 글쓰기를 귀찮아한다면 곤란하다. 번역은 글로 소통하는 일이다. 번역가에게는 정확성과 명료성이 가장 기본이 되고 그 위에 문체나 개성 등을 덧붙이게 된다. 문법에 어긋나지 않고 잘 이해되는 문장들이 유려하게 연결되어 핵심 주제가 드러나게끔 쓸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건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느냐의 문제일 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 글을 계속 고쳐 써보고 남들이 읽어보게 해 의견을 들어보는 식으로 연습이 가능하다.

 

셋째, 인내심이 필요하다. 마음먹은 대로 후딱후딱 번역이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문 문장이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야 할 때도 있고, 필요한 정보가 쉽게 나오지 않아 검색에 매달려야 할 때도 있다. 동일 저자의 다른 책, 동일 주제의 다른 책을 구해 읽어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마감이 정해진 상황에서 진도가 안 나가면 속이 타들어간다. 그 압박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느릿느릿 우직하게 나아갈 수 있어야 번역 일이 가능하다.

 

넷째, 자기관리가 안 된다면 번역판에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번역은 혼자 하는 일이다. 마감 시한에 맞춰 일을 끝내려면 시간도 관리해야 하고 건강도 관리해야 한다. 하루가 24시간이라지만 24시간 내내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껏 해야 예닐곱 시간 정도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벼락치기로 번역을 해치우려 든다면 작업 효율이 떨어지고 당연히 번역 품질도 하락한다. 몸도 망가지기 쉽다. 번역은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번역가 중에는 허리병이나 어깨병, 위장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 많다. 끼니를 알아서 제때 챙겨 먹고 자신에게 맞는 운동도 찾아 해야 한다. 혼자 책하고만 씨름하고 있으면 우울해진다. 그럼 친구를 만나서 노는 시간도 필요한데 그 시간을 작업 일정에 어떻게 끼워 넣을지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다섯째, 화려하게 조명 받는 삶을 원한다면 번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번역가는 연기하는 배우보다는 무대 뒤에 선 연출가에 더 가깝다. 최선을 다해 원서를 분석하고 번역서로 연출해내지만 그 역할이 주목 받는 일은 별로 없다. 운이 좋아 대박 베스트셀러가 된다 해도 그렇다. 영광은 저자의 몫이다. 우리나라는 출판 도서 중 번역서 비중이 세계에서 으뜸 갈 정도로 높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기억하는 번역가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세 명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명예와 각광을 기대하지 않고 혼자 텍스트와 마주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번역가의 길을 갈 수 있다.

 

주의사항을 다 듣고 난 다음에도 자신에게 적합한 일이라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도전할 만하다. 책 번역을 시작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번역서를 내는 출판사에 이력서를 보내는 것이다. (합이 맞을 것 같은 여러 곳에 보내야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당신이 번역을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 예시 번역문을 넣어 보낸다면 더욱 좋다. 일하느라 분주한 출판사에서 바로 그걸 확인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일 잘하는 번역가가 늘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연락이 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신이 점찍은 특정 책을 번역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고 싶다면 그 책에 표시된 저작권 정보에 나온 저작권자에게 연락해 한국어판 저작권이 아직 팔리지 않은 상태인지 확인한다. 벌써 팔려서 번역되었거나 번역이 진행 중이라면 당신의 번역은 불가능하다. 다행히 저작권이 팔리지 않았다면 그 책의 일부 번역을 포함해 소개 자료를 만들고 출판사에 보내면 된다. 그 책에 관심이 있을 만한 출판사를 선정해야 승산이 있다.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게 된다는 전망이 무성한데 번역가의 미래가 전망이 있을까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번역 작업, 예를 들어 여행자 회화 번역, 동일한 표현이 반복되는 문서 번역 등은 자동화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책 번역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계로 대체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원문을 분석하는 작업, 번역문을 써가는 작업이 데이터베이스 기반의 학습으로 해결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기계가 사람처럼 능숙하게 책 번역을 하는 시대가 왔다면 아마 거의 모든 직업이 기계에게 넘어간 후일 테니 굳이 번역에 대해서만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삽화: 김아영 (영어영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