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으면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봐야, 그 중 누군가는 마음에 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질색하면서 싫어해 봐야, 그리고 대체 뭐가 마음에 들거나 질색인지 고민해 봐야,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 사람인지,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드러난다.
번역은 바로 그렇게 계속 내 바깥과 부딪히면서 나를 발견해가는 일이다.
번역 수업 시간에 ‘금번 투자 적합도 순위 평가와 향후 외국인의 투자 규모는 마치 출구 조사와 개표 결과의 관계와 같다.’라는 의미의 원문 문장이 등장했던 적이 있다. 학생들의 번역 문장은 정반대로 갈렸다. 한쪽은 투자 적합도 평가와 투자 규모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다른 한쪽은 두 가지가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출구 조사와 개표 결과에 대한 생각 차이 때문이었다. 그 동안 여러 선거를 지켜보면서 출구 조사는 개표 결과와 아무 상관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사람과, 이와 반대로 출구 조사는 개표 결과를 미리 보여주는 지표라고 여기게 된 사람은 번역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의 믿음을 바탕으로 문장을 옮기는 것이다. 출구 조사와 개표 결과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은 원문 글쓴이는 대체 어떤 생각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원문의 전체의 논지와 다른 부분에 등장하는 문장들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번역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도 학생들도 출구 조사에 대해 스스로 가진 선입견을 돌이켜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렇듯 계속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선입견이 작동해 잘못 읽고 잘못 옮기게 되지 않을까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러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이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번역을 하면서 새로운 주장과 의견을 접할 때 일단은 ‘저자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생각하는군!’이라는 이해가 먼저이지만 다음으로는 ‘그럼 나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저자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글을 썼을 테고 그렇다면 원문의 독자인 동시에 번역문의 저자인 번역자부터 설득이, 혹은 설득까지는 아니더라도 납득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저자의 생각에 대한 내 생각을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경험과 전제, 논리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 역시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때로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영어와 러시아어라는 서양언어권의 원문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을 주로 한다. 서양의 언어문화는 내 것이 아니니 계속 찾아보고 물어보면서 원문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문제는 동양 문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 수양을 다루는 영어 책들을 번역하다 보면 결국 불교나 도교, 일본 선 사상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일이 적지 않다. 동양인 번역가인 내가 알지 못하는 동양 사상 이야기가 서양 저자의 글로 풀려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를 바탕으로 이어진 서양 철학사상도 모르고 동양의 불교와 유교, 도가도 모르는 나는 대체 누구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그럼 한국 전통 문화는 잘 아느냐 짚어보면 그것도 자신이 없다. 전통 의식주 문화, 전통 놀이나 예술 분야에서는 아는 어휘보다 모르는 어휘가 훨씬 더 많다. 이런 분야를 다루게 된다면 외국어 어휘를 대할 때와 똑같이 힘들여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제대로 공부를 안 하고 식견이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어쩌면 내가 받은 7,80년대의 학교 교육 탓도 있을 것이다. 그 교육은 한국의 고유 문화나 사상보다는 서양의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서 선진국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양의 것도 전통보다는 동시대 실용 지식을 중심으로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버린 꼴이다. 라틴어 인용문도 해독이 안 되고 한문 구절도 이해하지 못한다. 번역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내 모습을 몰랐을 것이다. 공부하고 채워가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 채 그저 그러려니 살았을 것이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을 계속 비교하고 깨닫는 작업은 언어에서도 일어난다. 번역이라고 하면 외국어 능력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번역은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다.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사용해 온 한국어가 어떤 특징을 지닌 언어인지는 다른 언어와 견줘봐야 알 수 있는데 번역은 바로 그런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의 가정법이나 완료시제, 수동 형태는 한국어에 그대로 가져오기 어렵다. 그러면 한국어는 이걸 어떻게 표현해내는 언어인지 고민하게 된다.
한국어에서는 높임법이 중요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나이나 신분의 서열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친밀도가 어떤지 바로 드러난다. 많은 경우 서양어의 원문에서는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정보이다. 그 차이를 번역자가 메워야 한다. 인물들 중 누가 연장자이고 신분이 높은지 판단해 말투에 일일이 반영하면서 말이다. 사전에 전체 구도를 다 파악한 뒤 번역을 해나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참 번역이 진행된 후에 앞부분의 높임법을 다 수정해야 하는 일도 벌어진다. 번역자가 상상하던 서열 관계가 뒤집히기 때문에 그렇다. sister가 손위 언니나 누나인지, 손아래 여동생인지 원문에서는 끝내 알려주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번역자는 원문 밖의 정보까지 총동원해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야 한다. 이걸 모른 채로는 한국어에서 호칭도, 지칭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해 한국어를 점점 더 많이 알아가면서 나는 모국어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조사 하나를 바꿔 넣어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도 있고 종결어미로 인물의 성격과 태도까지 단번에 드러내주는 한국어의 표현력은 번역을 더 즐거운 작업으로 만든다.
어느 언어든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한국어 또한 번역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오랫동안 한문을 문어로 사용해온 한국어는 1945년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한글 문어의 시대를 맞았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때는 15세기였으나 이후에도 공식 문어는 대부분 한문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한글로 쓰인 책이나 자료는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문학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해외 자료가 봇물 터지듯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새로운 어휘가 대거 한국어에 편입되었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한국어 글쓰기 규범도 번역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문장을 만들고 문단을 구성하고 하나의 텍스트를 조직하는 방법이 쏟아지는 번역물 속에서 확립되었다. 지금도 출판 도서의 4분의 1이 번역서인 한국에서는 번역의 영향이 지속된다. 번역투니 보그체니 하는 비판과 논란도 많지만 어떻든 번역 덕분에 우리 사회는 한국어가 어떤 언어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옳은지 계속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이렇듯 번역은 나라는 존재의 선입견과 정체성을, 내 문화와 언어의 특성을 나 아닌 바깥과의 비교를 통해 발견해가는 작업이다. 외국어 원문을 한국어로 옮긴다고 하면 남의 것을 들여오는 일로만 여기기 쉽지만 실은 남의 것을 살피며 내 것을 알아내는 일이 된다.
삽화: 김아영 (영어영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