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 소개한 대로 번역에는 사건사고가 많다. 그리고 1999년부터 번역을 시작한 나도 독자들의 냉정한 비판을 피해가지 못했다. ‘원서와 저자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역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주의들을 기울이지 않았다. (…) 문제가 없는 페이지가 거의 없다.’라는 가혹한 평가가 기사화되기도 했다. 내가 번역해 출간된 책이 저작권 확보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고 1년여가 지나 같은 책이 번역되어 나오면서 동원된 홍보 전략 중 하나가 ‘이전 책 짓밟기’였던 탓에 나온 평가였다. 문제된 책, 알도 레오폴드의 A Sand County Almanac은 번역하면서 여러 차례 나를 감탄하게 만들고 감동으로 이끈 아름다운 책이었다. 나는 ‘기본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번역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작권이 확보되지 못한 번역서였으므로 결국 내 번역은 시장에서 금방 사라졌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인터넷 서점의 독자 서평에서 ‘중국 상황이 등장하는데 번역가의 지식이 충분치 못하다’든지, ‘동식물 명칭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든지 하는 불만의 댓글들도 여럿 받아 보았다. 나는 주제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작업하는 번역가니 특정 분야의 전문가는 못 된다. 나름대로 최대한 정보를 찾고 공부한다고는 해도 전문적 식견을 지닌 독자 눈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써 번역한 결과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서평에 등장하는 번역 얘기가 대부분 부정적이라는 점도 여기서 한몫을 한다. 만족한 독자들은 굳이 번역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왜 번역을 계속하는 걸까?” 번역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들도 내게 묻는다. “그 골 빠지는 일을 뭐 좋다고 계속하는 거예요?”
답은 간단하다. 나는 번역이 좋다.
번역이 좋은 첫 번째 이유는 늘 새로운 것을 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하는 책 번역은 두세 달을 주기로 원서가 바뀐다. 소설과 한참 씨름하다가 에세이로 넘어가고 다음에는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를 만나는 식이다. 책마다 서로 다른 정보를 담고 있다. 그 정보를 이해하고 전달하려면 번역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자료를 찾고 공부해야 한다. 전문가 행세를 할 정도의 수준은 못 되어도 저자와 독자 사이를 문제 없이 중개할 만큼은 공부가 필요하다.
『알리와 니노』라는 소설은 1910-1920년대 아제르바이잔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 화자인 남자 주인공은 이슬람 시아파 교도이고 여자 주인공은 기독교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 카프카즈 산속 마을, 할렘을 갖춘 이란의 귀족 저택 등 다양한 배경 속에서 남녀의 서로 다른 믿음과 관점이 충돌하고 여기에 러시아, 터키, 영국 등 열강들이 벌이는 갈등과 전쟁도 끼어든다. 전혀 몰랐던 그 시대의 그 공간에 대해 나는 번역을 통해 배웠고 당시 역사에 대해, 이슬람 교도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수학에 흥미도, 재능도 없었던 탓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제 수학과는 영원히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번역을 하면서 수학 교양서를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다. 인류 문명의 발달에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 씨줄 역할을 했는지 다루는 『문명과 수학』을 번역할 때는 학창 시절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수학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성경을 제대로 통독해본 적도 없었던 내가 성경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되면서는 여러 번역 판본을 비교하면서 읽고 고심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번역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치밀한 독서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퍽 좋아했지만 읽기가 익숙해진 어느 순간부터 빨리 읽는 버릇이 생겼다. 사소한 부분은 넘겨버리면서 큰 줄기 중심으로 읽어버리는 것이다. 더 빨리, 더 많이 읽는 방법이긴 해도 치밀하게 읽기는 어렵다. 그런데 번역은 그렇게 읽어서는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단어 하나, 문장 부호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는 치밀한 책 읽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꼼꼼한 읽기는 빨리 대충 읽을 때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끔 한다. 나도 처음에는 익숙하던 읽기 속도가 확 늦어지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저자가 펼쳐놓은 세상을 빠짐없이 잡아내며 (아니, 그래도 놓치는 부분이 많을 테니 ‘잡아내려 노력하며’가 더 맞겠다.) 읽는 게 퍽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한 권은 전체가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야 완성되는 풍경이다. 저자는 풍경 속에 무엇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조금씩 야금야금 풀어놓기 때문이다. 앞쪽에서 등장했던 특정 단어가 한참 뒤에서 다시 등장한다면 일단 그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저자가 어떤 의도로 반복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등장 인물의 성격이나 정체성은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다. ‘아, 이런 유형이군!’이라고 처음에 했던 생각은 책이 진행되면서 바뀌기 일쑤이다. 인물이 등장했다가 사라질 때까지 그 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 생각 등을 끝까지 따라가 봐야 풍경 속 그 인물이라는 요소가 정리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야 번역을 읽는 독자들이 마찬가지 단계를 거쳐 하나의 풍경을 찾아낼 수 있도록 번역을 구성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번역은 내게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볼 기회를 주어서 좋다. 우리는 모두 한 번 뿐인 삶을 산다. 시대와 공간을 비롯해 주어진 삶의 조건에 여러 모로 제한된 삶이다. 하지만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저자가 되고 등장인물이 되어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 번역자는 우선 저자에게 빙의된다. 언제 어디서 살았던 저자가 어떤 삶의 경험과 나름의 관점을 바탕으로 글을 써나가고 있는지 생각한다. 완벽하게 저자가 되어보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가능한 한 가까이 그 인물에게 접근한다. 그래야 왜 그 주제를 잡았는지, 왜 그런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지 큰 틀을 잡을 수 있다.
저자에 빙의되어 번역을 해나가면서 번역자는 다시금 등장인물 한명 한명에 자신을 대입한다. 수용자 입장으로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볼 때처럼 마음에 드는 한 명만 편을 들어서는 곤란하다. 그 인물에만 공감하고 나머지 다수에 대해서는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라고 넘겨버린다면 풍경이 충실히 구현될 수 없다. 각 인물이 나름의 특징과 신념을 유지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도록, 통일성과 설득력을 지니게끔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충돌하는 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번역자는 마치 일인다역의 연기자가 된 듯 각 측의 감정에 번갈아 몰입하고 각각의 말투를 살리면서 번역을 해나간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이는 사람과 세상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번역은 책과 컴퓨터 앞에 앉아 매일 같이 씨름하는 단조롭고 지루한 작업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짚은 측면들 덕분에 나는 번역이 몹시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십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번역에 매달려 있다.
삽화: 김아영 (영어영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