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는 끊임없이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오역’ 혹은 ‘번역 실패’라는 사건사고이다. 해외 영화가 개봉되면 자막에 대해, 도서가 출간되면 번역된 어휘와 문장에 대해 자주 논란이 벌어진다. 번역의 독자들, 즉 번역이라는 의사소통 서비스의 고객들이 불만을 제기함으로써 논란이 점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번역의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번역 과정의 ‘원문 분석 및 이해하기’ 단계와 ‘번역문으로 표현하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구분해 살펴보도록 하자. (번역문이라는 결과물에는 이 두 측면이 뒤엉켜 있지만 관찰의 편의상 나눠보자는 것이다.)
원문 분석 및 이해하기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사건사고 원인은 번역자가 원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언어적 능력 부족 때문일 수도, 문화적 지식 부족 때문일 수도, 주제지식의 결핍 때문일 수도 있다.
2011년에 터진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오역 논란은 방대한 협정문 번역 및 검토 작업 상당 부분을 행정 인턴들에게 맡긴 탓이었다고 보도되었다. “1000쪽이 넘는 협정문과 수백 개에 달하는 양허표를 일일이 사무관들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관행적으로 인턴들이 상당 부분 번역 내지 검독을 맡아온 것으로 안다”라는 것이 외교부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협정문은 법률 문서이다. 법률 문서를 이해하려면 일단 법률 언어와 관련 지식이 필요하다. 번역 업무에 대한 보수를 따로 지급받지 못하는 행정 인턴들이 알아서 법률 공부를 하면서 번역을 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설사 외교부 사무관들이 직접 번역을 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협정문 번역을 위해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고려하지 못하고 ‘영어 좀 하는’ 인력을 동원해 해결하려 했다는 데 있다. 번역 비용과 번역 기간을 절약하려는 의도도 물론 작용했을 것이다.
2016년, 작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라는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떠들썩하게 벌어진 오역 논란도 초점은 원문 이해력 결핍에 맞춰져 있었다. 번역자인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상황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지식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소리 한번 안 내고 자란 딸’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 했던 딸’로, ‘베이비시터가 펑크를 낸 것’이 ‘베이비시터의 차 타이어가 펑크 난 것’으로 번역되었다. 인물이 뒤바뀌고 단락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은 The Vegetarian은 『채식주의자』와 다른 작품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The Vegetarian은 영어권 독자들에게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원문의 정확한 전달이 번역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원문 언어와 문화의 이해도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처럼 절대적인가, 약소 언어인 한국어는 외국어로 번역될 때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가 등 여러 생각거리를 남겼다.
번역문으로 표현하기 측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번역문이 구현한 소통이 독자의 기대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번역자가 설정한 소통의 수준이 독자가 원하는 소통의 수준과 일치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원인은 참으로 다양하다.
2012년 12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사진과 함께 실린 문구는 <The Strongman’s Daughter>였다. 일부 언론이 이를 ‘독재자의 딸’로 번역해 보도하자 당시 새누리당은 보도 자료를 배포해 Strongman은 ‘독재자’가 아니라 ‘강력한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논란은 우습게 종결되었다. 바로 그날 「타임」측이 인터넷 판 제목을 <The Dictator’s Daughter>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번역이 지닌 정치적 측면을 보여주었다. ‘독재자’라는 표현을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측에게 ‘Strongman’은 얼마든지 긍정적인 의미로 바꿔 해석할 수 있는 단어였다. 무엇을 어떻게 번역하는가는 여론의 향방을 크게 좌우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여러 언론이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도하는 상황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번역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는 ‘오렌지’라는 단어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격렬한 전투 장면이 끝난 후 지친 앤트맨이 “Does anyone have orange slices?”라고 말한 대사가 “누구 오렌지 있어?”라고 자막 번역된 것이 문제였다. 관객들은 뜬금없이 등장한 오렌지에 당황했고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결국 배급사가 나서서 오렌지가 정확하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미국에서는 운동한 후 과일을 먹는 경우가 흔하고 오렌지가 가장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운동 후에 오렌지를 먹는 문화가 없는 한국 관객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관객은 번역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 않는, 매끄러운 영화 감상을 기대했다.) 번역자가 이를 예상했다면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이제 좀 간식 좀 먹어볼까?”라든지 “당 떨어졌는데 뭐 없나?” 같은 번역을 했다면? 안타깝게도 대안적 선택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영화 자막 번역은 원문을 소리로 듣고 있는 관객들에게 제공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귀에 ‘오렌지’가 들리는데 번역에 ‘오렌지’가 없다면 이 역시 관객들의 항의를 받기 쉽다.
번역의 사건사고가 잦은 데는 번역이 이루는 소통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가 다양하고 또 냉정하다는 원인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면에서 번역은 좀 억울하다. 본래 한국어로 쓰인 글은 표현이 서툴거나 구성이 어색해도 그러려니, 내 이해력이 문제려니 넘어가는 독자들이 외국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글 앞에서는 가혹하게 변모한다.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용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 일단 번역가의 자질 부족이나 번역 과정의 실수를 의심하니 말이다. 문체의 선호도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 결국 모든 이에게 합격인 번역은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글쓴이가 누리는 자율성과 권리가 번역자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 셈이다.
번역을 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번역의 사건사고에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번역을 통한 소통의 열망이 아주 크다는 점이 그것이다. 무관심보다는 비난이 낫다고, 번역이 어떻게 되든 아무 반응이 없는 상황보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꼬집는 상황이 긍정적이다.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소통에서는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예나 지금이나 아주 높고 따라서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번역의 방향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도 크다. 잦은 사건사고와 논란은 결국은 번역을 통한 더 질 높은 소통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흔히 줄타기에 비유된다. 하나도 아닌, 여러 층위의 줄이다. 원문과 번역문 사이에서, 원문 언어문화와 번역문 언어문화 사이에서, 번역자가 생각하는 소통과 독자가 기대하는 소통 사이에서, 다양한 독자의 서로 다른 기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사건사고는 줄 위의 균형이 삐끗할 때 일어난다. 삐끗하는 순간 뒤에는 악착같이 균형을 유지하는 순간들이 훨씬 많다는 점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삽화: 김아영 (영어영문학과)